류샤오보 사망으로 강화된 중국의 인터넷 검열

류샤오보 사망으로 중국의 공산당 독재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사망 즈음부터 인터넷에 기사가 끊이지 않고 올라오더니 중국내에서는 제법 파장이 큰 사건인가 봅니다. 조금전 연합 뉴스발 기사를 보니, 중국 당국이 끝내 외산 메신저 Whatsapp까지 손댔다는 보도입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7/07/19/0619000000AKR20170719059400009.HTML

그나마 남은 숨구멍도…중국내 왓츠앱 대거 통신차질


"중국은 올가을 국가 지도부를 임명하는 제19차 공산대회를 앞두고 최근 들어 인터넷 검열과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13일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타계하자 포털사이트와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상에서 그와 관련한 정보를 모두 차단하며 정보통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내에서는 진영논리때문에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뉴스이긴하지만 류샤오보 사망과  중국당국의 대응을 지켜보자니 다시한번 중국내 공산당 독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렇다면 류샤오보는 누구일까요?

"1955년 12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창춘 시에서 태어나 지린 대학 중문과를 졸업하였으며 베이징 사범대학교 중문과에서 석사 학위와 문예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베이징 사범대에서 강의를 열기도 했으며 198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서구와 중국 비교 문학 강사를 지냈다. 그해 말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옮겨가 리쩌허우 식의 중국식 마르크스주의론과 덩샤오핑의 시장 경제 결정론을 동시에 비판하는 중국 당대철학 및 정치 등을 강의하였다.[1]
1989년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방문학자로 체류 중이던 그는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자 귀국하여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을 전통 문화 사상과 연계하는 한편 중국 공자 비판에도 휩쓸린 자오쯔양의 5·4 운동 70주년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청년 지식인 대표 중 하나의 진영으로 앞서 중국 정부와 협상을 벌이었으며 폭력 시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2] 이후에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천안문 사태에 대해 정부 측 입장을 요구하던 축에 끼었다가 20개월 동안 구속됐다가 정부에 의해 풀려났으며 1996년 천안문 사태 노동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여 다시 노동 개조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비교적 온건한 학자 출신인 그는 문화 대혁명을 거친 당시 동년 혹은 선배 세대의 뭇 지식인들처럼 중국의 당시 역사적 변화의 무거운 흐름을 제대로 감지하지는 못하였다.[2]
구속 후 정권에 의해 풀려나는 과정을 번복하며 잡지 기고자로 활동하다가 2008년 12월 중국의 반체제 학자, 법률사, 기자, 학계 인사 등 303명이 신설한 정당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08 헌장(중국어 간체: 零八宪章영어: Charter 08)을 해외로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2009년 12월에 열린 재판에서 국가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은 이후에 랴오닝 성 진저우 시의 교도소에서 복역했다.[3] 그의 수감 생활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처음 수감된 이후에 네 번째 수감 생활이다.
2017년 5월에는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2017년 6월 26일에 가석방되었다. 그는 중국 의과 대학 부속 제1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7년 7월 13일에 사망하였다. - 위키백과"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됨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류샤오보.. 중국 현대사의 가장 끔찍했던 장면으로 기록됐던 천안문 사태를 맞아 중국내에 들어가 활동했던 민주화 인사... 천안문 사태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시다.

"시위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40주년, 5·4운동 70주년, 후야오방 전 중공 총서기 사망, 대륙 경제 통화팽창, 대륙 공산당 관리들의 부패, 대륙의 대량 인민 실업 직면, 소련의 정치와 경제 개혁이 주요한 배경이다. 4월 15일에 개시된 학생 시위대의 항의 운동 이후,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전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항의 충돌은 사태 전에도 있었고, 뒤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지지세력인 청렴파 후야오방과 유교반대파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하지만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베이징에서 학생 시위대 수천명이 공안(경찰)과 충돌한 일을 계기로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고, 자오쯔양이 후임 당 총서기가 됐다. 이런 후야오방이 4월 중난하이에서 소집된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심장병 발작으로 쓰러져 4월 15일 세상을 떠나자,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해임됐던 청렴파 후야오방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4월 17일부터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참가자 수는 계속 늘어났다. 4월 22일 장례식을 계기로 시안 등지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중국 당국은 5월 20일 부분적으로 계엄령을 내렸고,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전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반특권, 반부패 시위 확대가 후야오방의 사망이 발단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 급변이 진행되고 민족 분규가 잦아지는 등의 난국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으로 개방의 폭을 넓혀온 중국 실용주의파는 계획가격에 시장가격제를 급작스레 도입하고 국영근로자의 양로복지를 감축해 철밥통을 깨는 쌍궤제(雙軌制)라는 정책을 실시했으나 하위 간부들이 고통을 분담하기 보다 부패를 행해 인민의 항의 시위가 조장됐으며, 인민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실시 뒤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격화하자 인민들이 개혁개방 경제책을 내놓은 공산당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경제 개방을 위해 설치했던 특구가 조계지로 비판받기도 했다. 물가 상승과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불평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많은 하강 노동자와 학생들이 단위 체제와 산업 수요가 변화해 실업상태에 직면하였다. 항의 소요가 학생, 하강 근로자들, 농민공 뿐 아니라, 문화 대혁명 관련자들, 석방된 정치범들, 사회 불만세력들이 섞이며 후반에 들수록 격화하기도 했으며, 정부에 위협이 커지고 시위 사태의 수위가 높아지자 진압 결정이 내려졌다. - 위키백과"



중국내에세는 '류샤오보'라는 말 자체가 인터넷에 등장할수 없다고 합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장 답답한 사실중 하나... 이렇게 정리해보면서 류샤오보의 삶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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